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현판 글씨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얼마전 마지막 창덕궁을 지키고 사셨던 가혜 이방자 여사님이 돌아 가시고 텔레비젼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폭포〉·〈말〉등의 작품도 있다.
제자로는 고암 이응로가 있다.
묵향이청 .......삼각산인